배트맨 영화들배트맨 영화를 보자면 팀 버튼이 감독한 동화스러운 느낌의 배트맨부터 시작하여, 좀 유쾌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배트맨(별로 좋은 소린 못 들었죠...) 영화 두 편, 그리고 한참 있다가 다시 처음부터 프랜차이즈를 시작한 배트맨 비긴즈 순서입니다. 배트맨 비긴즈는 동화같은 느낌을 버리고 훨씬 현실에 근접하려고 노력했고, 그 덕에 나름대로 블록버스터이긴 한데 액션은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크 나이트도 블록버스터이지만 이번엔 배트맨 비긴즈보다도 액션이 안 나옵니다. 범죄 스릴러가 된 느낌이 더 크고, 그에 걸맞게 과학 수사 장면이 비중있게 나오기도 합니다.
조커의 증명 주제한편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가 참고된 곳을 꼽으면 역시 전 1회 한정 만화책으로 출판된 "The Killing Joke"를 고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조커는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재수없는 날" 하루만 겪으면 금세 돌아버리며, 배트맨이 자신과 다르지 않게 미쳤기 때문에 영웅놀이를 한다고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려놨습니다.
The Killing Joke의 줄거리
여느 때처럼 조커는 아캄 정신병원에서 달아나고 새로운 범죄를 계획합니다. 그것은 시민들, 그리고 고든 경찰청장을 납치하고 정신적인 고문을 가해 제정신을 잃고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커는 계획대로 고든을 납치해서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며 정신을 고문하는 유령 롤러코스터에 계속 태워놓지만, 그 계획은 고든 청장이 어떻게든 버텨내면서, 그리고 여느 때처럼 배트맨이 때마침 도착하여 고든 청장을 구해내며 실패합니다.
조커는 이런 짓을 계획한 이유가, 아무리 선량한 시민이라도 충격적인 "재수없는 날" 하루만 겪으면 정신줄을 놓고 미쳐버리며, 고담의 정의와 선을 대표하는 한 축인 고든 청장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조커는 쫓기면서도 배트맨이 정의를 구현한답시고 하는 짓이 제정신으로 하는 게 맞나 되묻습니다.
결국 조커는 배트맨에게 제압당하고 항복합니다. 배트맨은 조커를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조커는 도움을 거절하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비유한 농담을 하나 꺼내고, 배트맨도 농담 뜻을 알아들은 듯 둘은 같이 미친 듯이 웃으며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야기 중간 중간마다 조커의 과거 회상 장면이 들어가는데, 조커는 자기 입으로 "나한테 과거가 있다면 여러 개 있는 것이 더 좋다"면서 애매한 소리를 하지요. 이 조커로 변하게 되는 회상 장면은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일부분 쓰이기도 했습니다.
다크 나이트에서도 조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증명"입니다. 다만 이 증명은 모든 질서, 선, 고담 시민들의 도덕성을 부정하는 도전같습니다. 또한 여느 때처럼 완전히 실패하고 마는 "The Killing Joke"와는 다르게 다크 나이트에선 거의 다 성공합니다. 나름대로 명예와 존중을 따지는 마피아들은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 쳐낼 수 없는 조커에게 굴복하고, 정의감넘치고 담대한 고담의 검사 하비 덴트를 납치해서 나쁜 짓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도록 정신을 타락시킵니다. 시민들은 혼란과 공포에 떨고, 결국 피난까지 가려고 몰려듭니다.
영화 초반부터 나오지만 언제나 자기 목숨을 아랑곳않으며 똑똑하기까지 한 조커에겐 경찰도 배트맨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게다가 배트맨은 거의 영화 후반이 될 때까지 조커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조커가 할 일을 마피아나 건달이 아니라 악당에게 넘어간 경찰들까지 대신 해주기도 하고요. 조커가 협박해와서 시키는대로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웅의 몰락결국 간신히 배트맨은 고담 시 전체를 감청하는 도구를 써서 조커를 쫓는데, 그 과정도 영 시원치 않습니다. 이런 물건은 존재 자체가 위험하다고 극중 인물까지 "계속 쓰면 난 손떼겠다"고 말하는 지경이니 오죽할까요? 같은 편에게조차 믿음을 주지 못하다니.
게다가 뭔가 비뚤어진, 이상한 정의감으로 죽을 뻔한 조커를 살려주고는 온갖 비아냥만 사례로 듣고, 그리고 다시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서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복수랍시고 또 나쁜 짓을 하기 직전인 하비 덴트도 제압하지만, 이번엔 그의 정의로운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고담의 희망을 위해 하비 덴트가 했던 나쁜 짓을 몽땅 뒤집어쓰고는 수배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초반부터 허수아비가 잠깐 나와 약을 팔 때부터 짐작이 갔지만, 영화의 배트맨은 정의의 상징으로 시민들에게 믿음을 주긴 주는데 좀 비뚤어진 식으로 영감을 준 것 같고(총질하는 배트맨 카피들이라뇨! 하하하), 뉴스에서도 "무법자(vigilante - 사실 한글로는 마땅히 맞는 단어가 없네요)"로 소개되며 법을 어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수퍼맨이나 스파이더맨같이 여러분의 친구, 이웃으로 배트맨이 설 자리는, 적어도 고담 시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의와 선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시대비록 조커가 시민들과 죄수들의 목숨을 걸고 한 마지막 실험(?)은 실험대상들이 묵묵히 반항(...)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영화에서 직접 말하는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고 싶어하는 정의와 선의 가치는 별 것 아닌 듯한 약점에 덜미를 잡혀 순식간에 무너지고 하찮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깔끔하게 정의의 수퍼파워를 발휘해서 깔끔하게 악당을 물리치고 끝나는 다른 수퍼히어로 영화와는 다르게, 악당 하나 물리쳤다고 세상에 사랑과 정의와 행복이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실입니다. 실험 대상이 된 고담 시민들은, 죄수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둘 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현실에 조커같은 사이코패스가 나타나 이런 실험을 했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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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q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