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B - 또 재미없는 규칙

FIA 그룹 B 관련 규정
1982년엔 숫자 그룹이 사라지고, 알파벳 그룹이 대신 등장한다고 발표가 났습니다. 숫자 그룹과 비교해볼 때 그룹 N은 비개조 부문인 그룹 1, 그룹 A는 개조 부문인 2에 해당하며, 그룹 B는 예전의 그룹 4와 5(지붕이 있는 프로토타입)에 해당하고, 그룹 C는 그룹 5와 6(지붕없는 프로토타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룹 B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룹 4보다도 최소 생산 제한이 더욱 완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딱 200대만 같은 모델을 생산하면 그룹 B 인증을 받을 수 있었고, 더군다나 그 중의 20대는 역시 사양이 똑같기만 하다면 "에볼루션" 버전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정 생산 200대 중에 딱 20대만 개조를 똑같이 해놓고 "에볼루션" 버전이라고 한다면, 그 스무 대에다가는 뭔 개조를 하든 별 제한도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무게 제한이나 차량 소재 등도 아주 자유로운 편이라, 그룹 B가 중심이 된 랠리 대회는 이제 유수 메이커들이 모든 역량을 단 몇 십대에 쏟아부어 승리를 노리는 가혹한 전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옛날같이 도저히 가망이 없어보이는 미니가 포르셰를 눌러버리는 낭만적인 시대는 완전히 끝난 셈이죠.
르노 5(Cinq 생크) 터보
르노 5 터보는 평범한 경차인 르노 5를 기본으로 하여, 랠리 경기에 참전하기 위해 한정 생산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차체에 걸맞지 않게 엔진 힘이 과격해졌으며, 아예 뒷좌석을 없애고 엔진을 가운데 자리에 실었습니다. 겉모습을 본다면 그냥 르노 5와 비교해봐도 떡 벌어진 오버 펜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위압감을 줍니다.
5 터보는 처음엔 그룹 4 규격에 맞춘 차였지만, 생산 시기가 늦은 탓에(1980년부터 1984년까지) 그룹 B 시대의 강적들에 맞서야 했습니다. WRC 종합 우승을 차지한 적은 없지만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랠리 이벤트 중 하나인 투르 드 코르스(Tour de Corse 코르시카 랠리 - 1982년, 1985년 우승)와 몬테카를로 랠리(1981년)에서 우승하여 결코 작다고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란치아의 자존심, 037

1985 란치아 037 - 산레모 랠리 6위 (미키 비아시온)
037은 콰트로보다 무게중심 면에서 유리하고 구조도 간단하여 튼튼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엔진의 힘을 키워보자니 두 바퀴만 굴리는 차라 접지력을 잃고 너무 잘 미끄러져 큰 소용이 없었고, 게다가 "아무 길이나 가리지 않아야 하는" 랠리 자동차에서 이런 상대적인 단점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같은 이유로 예전의 스트라토스도 결코 300마력은 넘지 않았습니다. 결코 기술이 없어서 못한 게 아닙니다. 사실 스트라토스도 데뷔 전까지의 랠리 차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파워였습니다(알피느 A110과 견줘봐도 1.5배 이상).
037은 그러므로 비교적 접지력이 괜찮은 타맥(아스팔트 포장도로) 구간에서 더욱 뛰어나다고 한 사람이 많은데, 위의 르노 5 터보도 마찬가지 평을 들었습니다. 르노 5 터보가 우승했던 코르시카는 전부 타맥 구간이고, 겨울에 치러지는 몬테카를로 랠리의 코스는 아스팔트 위에 간간히 눈이 있는 정도거든요.
2<4, 아우디 콰트로(Quattro)
1979년부터 규칙이 개정되어 네 바퀴를 굴리는 자동차도 랠리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앞바퀴를 굴리는 자동차를 만들어왔던 아우디는 1980년, 네 바퀴를 전부 굴리는 스포츠 쿠페인 콰트로를 발매합니다. 네 바퀴를 굴리는 게 특별히 생각하기 힘든 구조도 아니고(1903년에 처음 등장), 전쟁 때도 많이 쓰였고(지프), 1972년엔 대중적인 소형 승용차도 나와서(스바루 레오네) 나름대로 잘 팔리기 시작했으니 기술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모터스포츠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다른 메이커가 줄줄이 네바퀴 굴림 승용차를 만드는데 영향을 준 것은 콰트로가 처음입니다. 당시의 스바루는, 물론 네바퀴 굴림에 대한 기술은 있지만 아우디만큼 영향력을 떨칠 정도는 못 되었죠.
이런 콰트로가 처음 랠리에 나왔을 때의 악평은 037의 장점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구조도 복잡해서 잘 망가지고, 고치기도 어려울 것이고, 무겁고, 엔진도 앞에 실려있다는 둥...
그런 콰트로는 데뷔한 첫 해에 바로 우승을 따내어 악평을 잠재워버렸습니다. 1981년에 WRC 두 라운드에서 1위를 차지하는데, 그 중에 WRC 최초로 여성 랠리 드라이버인 미셸 모튼이 콰트로를 몰고 산레모 랠리(Rallye Sanremo)에서 우승하여 역사의 의미있는 한 쪽을 채워넣었습니다.
1982년은 이런 기세를 확실히 이어간 해로, 전체 이벤트 10번 중 1위 6회, 2위 1회를 차지하여 종합 우승을 차지하고, 1983년엔 거의 전 이벤트에서 란치아 037과 1, 2, 3위를 다투는 피말리는 다툼 끝에 딱 2점 차이로 아쉽게 2위로 밀렸지만, 다음 해에는 다시 란치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84년 후반부터는 워낙 다른 경쟁자들의 기술 발전이 빨랐기 때문에, 원래 태생(숫자 그룹)에서 밀리는 감이 있던 콰트로는 분전했지만 1985년부터는 거의 이벤트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랠리 강자의 후손들
아우디 콰트로의 활약으로(1983년엔 드라이버 종합 우승) 랠리 자동차가 네 바퀴를 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편 콰트로는 이제 단순한 자동차 이름이 아니라 아우디의 네바퀴 굴림 자동차마다 붙으며 아우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요새는 구분을 위해 자동차는 Quattro, 네바퀴 굴림 시스템은 quattro로 표기).
르노 5 터보에서 이용된 수법은 5의 후속 모델인 클리오에서 클리오 V6 르노스포르의 이름을 달고 부활했지만, 물론 르노는 현재 WRC 최고 클래스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퀴 두 개만 굴려서는 우승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또 지금은 WRC 대신 광고가 훨씬 잘 될 법한(그리고 성적도 매우 훌륭한) F1에 출전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여담으로 클리오 V6 르노스포르는 실용성이 매우 부족한 편이라, 현대의 다른 경쟁 상대들보다 인기는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무게 1400kg, 배기량 3000cc, 뒷좌석 공간 없음-_-;). 물론 서킷 위에 올라가기만 한다면 세계 최강의 핫 해치 중 하나겠지만요...
ps. 세이브 카드 구출(...)
Start : 2006/09/27 02:29
Finish : 2006/10/02 20:33
Posted by pequt

